학교다닐 시절 종종 하던 봉사활동이 있다.
Table of Contents
“프랑스 입양아들의 핏줄찾기”
해외 입양아들이 한국에 와서 본인들의 핏줄을 찾는 다큐멘터리식 영화를 보고부터였을까, 아니면 어쩌다 알게된 프랑스 한국인 입양아 협회 사람을 알게되고서부터 였을까. 본인의 뿌리를 찾고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아주 작은 행동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봉사활동을 하곤 했다.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둘 다 하는 나의 입장으로서 편지 번역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고, 사람찾는것 또한, 인터넷과 함께 나고 자란 나에게 있어서 SNS 나 구글로 사람찾기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좋은 마음으로 봉사를 하곤 했다. (물론 항상 좋게만 끝났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 해외입양 ?
대한민국의 첫 해외입양은 53년도로 기록되어있으며, 그는 혼혈아 입양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게, 한창 한국전쟁중이던 시기고, 전쟁중 수많은 고아들이 생긴데다가,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나온 혼혈아들이 문제가 되었을법도 하다. 고아가 아니었던들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양가, 특히 여성의 부모님께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지라 미군과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를 가진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미혼모 딱지가 붙는데다가, 누가봐도 “튀기(그 시절 혼혈아 비하하는 뜻하는 단어이나, 그 상황에 맞춰 그대로 인용하도록 하겠다)”인 아이들을 그 보수적인 한국 땅에서 기를 용기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1955∼59년 해외 입양인 2887명 가운데 약 70%가 혼혈아 입양이었으며, 입양국가의 대부분이 미국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어느정도 혼혈아 입양은 줄었다. (전쟁이 끝나서 미국이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일까?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입양아 문제가 많은데, 과거에는 경제적 문제로, 혹은 문화적 문제(혼혈아)로 인해 입양을 보냈다면, 지금은 급격한 미혼모의 증가와 사회적 편견, 제도적 지원 미비로 인한 아이 유기가 많다. 이로 인해 얻은 오명, “한국, 아이 수출국”
한국, 아이 수출국 ?
한국에겐 “아이 수출국”이라는 오명이 있다.
초기 한국 해외입양의 가장 큰 원인은 전쟁 직후 빈곤으로 인한 문제였으나, 한국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한 이후 한국은 자연스레 아이 수출국 1위의 위치를 다른 국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OECD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해외입양을 보내는 나라이다.
과거에는 경제적 문제로, 혹은 문화적 문제(혼혈아)로 인해 입양을 보냈다면, 지금은 급격한 미혼모의 증가와 사회적 편견, 제도적 지원 미비로 인한 아이 유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 내에서 새 가족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혈연 중심적 가족관계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핏줄”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혈통이 아닌 아이를 키우기 꺼려서, 오래전에 있었던 입양은 보통 가족끼리의 입양이 많았다. (자손이 없는 친척집에 입양가는 경우)
어떻게 보자면 자국 내에서 공급은 많지만 수요는 없는 상황에서, 국가가 찾은 유일한 방법은 “해외 입양”이 아니었나 싶다.
프랑스 입양아
프랑스의 한국인 입양은 미국보다 그 역사가 짧은데, 기사를 몇개 찾아보니 1980년대, 특히 1983년에서 1986년 사이에 피크였고, 이 기간동안 약 900명의 한국인들이 프랑스 가정에 입양되었으며,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정부의 자국 내 입양 권장정책으로 인해서 해외 입양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남편의 대학친구중 몇명이 한국인 입양아인데, 우연찮게 그들도 80년대생인걸 보면 틀린말은 아닌것 같기도.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인들은 최근 프랑스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전 문화부장관 플뢰르 펠르랭 (Fleur Pellerin), 정치인 장뱅상 플라세 Jean-Vincent Placé 와 조아킴 손포르제Joachim Son-Forget 그리고 유명 셰프 피에르상 보와예 Pierre Sang Boyer (결혼식 피로연을 피에르상의 레스토랑에서 진행했다)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한국은 그저 자신이 태어난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다. 플뢰르 펠르랑이 말했듯 “나는 한국인이 아닌 프랑스인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회적으로 성공한 입양아들 입장으로서, 본인들을 입양보낼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한국인 프랑스 장관!” 등으로 한국인 프레임을 끼워넣는게 얼마나 화나가고 어이 없을까 싶지만, 굳이 성공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본인을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위에서 말한 남편의 대학친구는 한국으로 교환학생까지 갔었지만, 단순히 게임을 좋아했기에 (스타크래프트) 관심을 가졌을 뿐, 자신의 친부모를 찾아볼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왜? “내 부모는 프랑스에 있으니까.”
난 그래서 봉사활동을 할 때, 입양아 본인이 뿌리를 찾고싶어하는것이 아닌 이상은 절대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다. 본인을 버렸던 나라에 환멸을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기에.
프랑스 입양아 핏줄찾기 봉사활동
각설하고, 최근에 또 한 번, 40년 전 입양된 본인의 여동생들을 찾으신다며 페이스북 프랑스 한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신 분이 있어, 도움을 드리게 되었다.
40년간 찾아 헤메셨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돌아가시기 전 꼭 다시 한 번 동생들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도움을 청하게 되셨다고 하길래 안타까운 마음에 도움을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약간 이상했던 점이 있었는데,
- 여동생 둘을 프랑스의 한 가정으로 입양보냈다. 한 가정으로 보낸 입양이었기에 서류작업등이 깔끔해서 동생분들을 찾기 쉬웠을 것이나, 여태 찾지 못하셨다고 했다.
- 동생분들의 한국 이름만 말씀하시길래 “아 큰일났다, 한국이름으로 찾기 힘들텐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보여주신 사진에 생년월인, 프랑스어 이름등이 큰 글씨로 적혀 있었다.
- 페이스북에 동생분들 이름을 치자마자 바로 결과가 나왔다. (사실 여기서 좀 당황했다. 이렇게 쉬웠는데 40년간 찾아오셨다는데 …..)
-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시게 된 계기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여동생들을 찾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참고로 나는 1분만에 동생분들을 찾았다…. 정말 40년간 찾아 헤메신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생각들이 들었지만, 내가 어찌 감히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을 판단 하겠는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왕 도와드리기로 한거 동생분들께 연락을 했다.
혹시라도 동생분들이 오빠분을 만나는 것을 거절하거나, 심하면 나에게 욕을 퍼부을까봐 (이런 일이 심심치않게 있다) 무서웠지만, 다행히도 연락이 잘 닿았다.
하지만 문제는, 동생분들도, 오빠분가족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것. 심지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생분들은 나에게 따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오빠-동생1 과의 번역을 도와주고, 첫째오빠-동생2의 번역, 둘째오빠-동생1, 둘째오빠-동생 2…. 나는 이 분들의 모든 사생활을 알아가고 있었다.
물론 안타깝지만 이분들은 앞으로 평생 연락을 주고받을 사이고, 나는 그 사이에 낄 수 없다며 중간에 거절의 의사를 표했고, 나를 대신할 다른 봉사자를 찾으신다고 하더라도 그 분이 앞으로 평생 통번역을 해줄 수 있는것도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직접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셔야 한다고 말씀 드렸다.
약간 원망의 답변을 받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평생 그들의 메신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런 봉사활동을 하면 기분이 좋고 개운하기 마련인데, 이번 봉사활동은 뭔가 좀 찝찝함만 가득 남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