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Joomin 일상

나는 파리의 마케팅 매니저

어렸을 때 부터 마케터가 꿈이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항상 마케팅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아주 잠깐동안은 마케터가 되고 싶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15살 중학교 2학년 때 (그러고보니 학창시절 나이는 한국나이로 세는게 편하다) 10년뒤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15살 소녀의 10년 뒤는 멋진 25살 커리어 우먼. 모닝커피 한 잔을 하며 출근해서, 보란듯이 업무를 척척 해내는 수퍼우먼. 통통 튀는 아이디어로 하는 일마다 인정받는 능력있는 여자. 최고 연봉은 아닐지라도 먹고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도 남들에게 베풀 여유도 있는 멋진 여자.

안타깝게도 15살의 중학교 2학년 소녀는 10년 뒤, 불쌍하고 가난한 해외 유학생이 되어 부모님이 주시는 생활비을 송금하기 위해 공인인증서와 고군분투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등골 브레이커로 산 결과, 불쌍하고 가난했던 유학생은 취직을 했고, 현재 프랑스에서 마케팅 업무를 보고있다.

프랑스 마케팅 매니저 ? 멋있다 !

취직은 어떻게 했다지만, 15살 소녀의 꿈은 그냥 취직이 아니라 멋진 마케터. 그 꿈은 아직도 이루지 못했고, 여전히 꿈꾸고있는 중이다.

마케팅을 한다면 뭔가 멋진 일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도 이런 시궁창이 없다. 잡다한 업무가 이리도 많은지. 문제는 잡다하다고 사소한 업무가 아니라는거다. 너무 중요하다. 마케팅은 전문성이 없이도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접근성이 매우 좋은 직군이지만, 업무의 스펙트럼도 꽤 넓어서 이것저것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마케팅은 굉장히 귀찮은 업무다. 근데 웃기게도 나한테는 잘 맞는다. 왜냐면 나는 대충 다 할줄 알지만, 그 수준들은 그닥 높지 않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스탯 잘못 찍은 잡캐” 이기 때문.

스탯 잘못찍은 잡캐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말인가, 싶어할수도 있어 짧게 적는 설명.

스탯‘ Stat은 Statistic의 줄인 표현으로, 캐릭터의 능력을 보여주는 수치라는 의미이고, 좋은 캐릭터를 키우려면 스탯/스킬을 신중히 골라야한다. 왜냐하면 레벨이 올라가면서 스탯/스킬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성향이 180도 바뀌기 때문.

더 쉽게 말하자면, 마법사냐, 전사냐 그 차이다.

어렸을적 하던 디아블로 소서리스 (마법사)의 스킬트리. 이때부터 난 전기 / 불 / 얼음 속성을 막 섞은 잡캐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마법사라고 하기에도 애매, 전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스탯을 가지고 있다. 디자인, 영상제작, 개발, 분석 등 할줄 아는 것은 많지만, 막상 심도있는 업무를 하려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잡종 캐릭터, 한마디로 잡캐다.

게임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잡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냥 캐릭터 삭제하고 새로 키우는게 나을정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잡캐”여서 마케터로 그냥저냥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전문성이 없는 마케팅 매니저

나는 전문성이 없다. 남편부터 시작해서 주변에 유난히 개발자들을 포함한 여러 엔지니어들이 더 많아서 나의 無전문성은 더욱더 빛을 발한다.

우연인지 다행인지, 나름 지금 보고있는 마케팅 업무가 나름 적성에 맞는다. 물론 마케팅도 여러 분야가 있어서 깊이 들어가면 “전문가”가 될 수 있지만, 나는 그정도까지 수준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음은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마케팅을 즐겁게 하고있다. 천재적인 아이디어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적성에 맞는 일을 재밌게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 아닐까 싶다.

전문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

왜냐하면 나는 제품 마케팅 매니저

자신이 판매하고 있는 제품에 대한 자세한 정보, 시장 동향정도는 당연히 알아야겠다. (이부분은 전문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노력으로 충분히 메꿀 수 있는 것이니.)

제품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활동이 필요한데, 보도자료 제작, SNS 등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제품을 알리기 위한 리플렛, 카탈로그 제작, 리드 제너레이션을 위한 랜딩페이지 제작, 고객들과 지속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뉴스레터, 핵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드는 여러 컨텐츠들, 판매를 부스트 하기 위한 여러 이벤트 및 인센티브 프로그램… 등

아직 다 적지 못했지만, 그냥 이런저런 종류의 마케팅 활동이 있다.

이 모든 마케팅을 위한 담당자하 한명씩 있으면 좋겠건만, 그건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현실적으로는 한두사람이 이 모든 업무를 맡아서 하고, 타부서와 협업을 하거나, 예산이 충분하다면 타 업체에 업무를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인원도 부족한 회사에서 과연 예산이 넘쳐날까?)

마케터의 고충, 넓디넓은 업무 스펙트럼

이런 상황에서, 나의 잡캐성(?)은 빛을 발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웬만한 디자인 툴도 다 만지작거릴줄 알고, 사진,영상 편집도 나름 취미수준으로 할줄 알며,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간단한 HTML/CSS 정도는 사용힐 줄 알기에 랜딩페이지나 뉴스레터 제작에 큰 무리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급할땐 내가, 급하지 않고 예산도 충분하면 타 업체에 업무를 맡기는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가능한지, 어떻게 해아하는지 아주 잘 알고있기에 효과적인 업무 요청이 가능하다.

마케팅,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범인凡人중에서도 가장 평범한 사람. 내가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창의력, 그리고 마케팅 전문분야가 있다면 물론 매우매우 좋겠지만, 그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은 커뮤니케이션 스킬과 넓은 시야가 아닐까 싶다.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것을 알아야하며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나가야 한다.

뭣도아닌 초짜 마케터가 이런 글을 써서 우습지만, 뒤돌아보면 고생도 많이 했고, 그만큼 많이 자란게 보여 쓰는 글. 그리고 “잡캐”를 안타까워하지 않고, “캐릭터 삭제”하지 않고, 잡캐를 강점으로 살려 더욱 멋진 마케터가 되겠다는 다짐.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간 15살 소녀가 꿈꾸던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될 수 있겠지 !